체로서의 불멸은 결코 아니다.}(요 1:4의 주석).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청년이 영생(ζωὴν αἰώνιον)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. 아마도 유대인인 그는 율법에 근거된 영생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. 다니엘 12:2에는 “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”라고 하였고, 마카비 II 7:9에는 “세상의 왕이 우리를 일으켜,······영원한 삶을 얻게 하리라”라고 하였다. 그러므로 그가 이해한 영생이란 죽은 후에 부활하여 천국(메시아 왕국)에서 영원토록 누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. 그렇다면, 그의 질문의 요지는 세상 끝 날에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구원 곧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. {레인(W. L. Lane)은 “그의 질문 형식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천국 또는 영생을 무력한 상태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성취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.”라고 하였다. 그 질문의 배경에 대해, 그닐카(J. Gnilka, 하권, p. 117)는 “묵시문학과 함께 비로소 유다교에 퍼진 부활 신앙은,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구원 곧 영생을 보증하지 않고, 개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 결단과 실행에 맞서도록 촉구하였다.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을 갖게 되면 행해야 할 율법에 주목하게 되고, 율법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. 쿰란 종파에서 확실한 구원(영생)의 길로 간주되었던 엄격한 토라주의(율법주의)에 이르기까지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설들은 이 나라의 적지 않은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혼란을 빚도록 하였을 것이다. 아무튼, 그의 질문에는 율법주의의 근본적인 잘못이 드러났다. 즉, 구원(영생)은 무엇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,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(영생)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.”라고 하였다.}(막 10:17의 주석). 그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, 마태는【17】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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